큐레이션

은퇴 후 둘이도 넉넉하고 가족과도 좁지 않은, 24평 모듈러 세컨하우스

은퇴하고 나면, 하루가 길어집니다 출근하지 않는 아침, 정해진 일정이 없는 오후. 그 시간을 어디에서 보낼지가 다음 삶을 정합니다. 제주 바다가 정면으로 열리는 경사지, 둘이 지내기엔 여유롭고 자녀가 찾아와도 좁지 않은 모듈러 24평 세컨하우스입니다.

유닛하우스 매거진· · 읽는 시간 약 5분
은퇴 후 둘이도 넉넉하고 가족과도 좁지 않은, 24평 모듈러 세컨하우스

은퇴하면 집의 역할이 바뀐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 집은 밤에 돌아와 자는 곳이었다. 출근하지 않는 아침이 시작되면 집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무대가 된다. 거실에 앉아 있는 시간, 창밖을 보는 시간,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시간이 전부 길어진다.

이 변화는 평면에 그대로 영향을 준다. 잠깐 머무는 집이라면 방의 개수가 중요하지만, 오래 머무는 집은 '어디에 앉아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해진다. 하루 종일 마주할 벽인지, 하루 종일 바라볼 바다인지에 따라 같은 24평도 전혀 다른 집이 된다.

동시에 관계도 바뀐다. 자녀는 이제 함께 사는 가족이 아니라 찾아오는 손님이다. 1년에 몇 번, 며칠씩. 이 빈도를 어떻게 평면에 반영하느냐가 세컨하우스 설계에서 가장 자주 어긋나는 지점이다. 손님방을 만들면 1년의 대부분을 비워두게 되고, 만들지 않으면 자녀가 왔을 때 두 사람의 일상이 무너진다.

24평이라는 크기의 근거

H-24의 평형은 두 개의 조건 사이에서 결정됐다. 평소 두 사람이 지내기엔 여유로울 것, 자녀가 찾아와도 좁지 않을 것.

이 두 조건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당긴다. 둘만 생각하면 18평도 충분하고, 손님을 기준으로 하면 30평도 부족하다. 24평은 평소의 크기에 '가끔'을 감당할 여유를 더한 지점이다. 중요한 건 총면적보다 그 24평을 어떻게 쪼갰느냐다.

H 형태로 나눈다는 것

H-24는 9평 모듈 두 개와 6평 모듈 하나, 세 개의 모듈로 구성된다. 공장에서 각각 만들어 현장에서 H 형태로 결합한다.

H의 핵심은 채워진 부분이 아니라 비워진 부분이다. 두 동 사이에 남는 자리를 실내로 채우지 않고 데크로 두었다. 이 데크는 세 방향이 건물과 지형에 둘러싸여 바람을 덜 받고, 바다를 향한 한쪽만 시원하게 열린다. 마당을 앞에 붙이는 대신 집이 마당을 감싸 안는 구성이다.

거실 전면에는 폴딩도어를 계획했다. 문을 접으면 실내 바닥과 데크가 한 면으로 이어져,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실이 데크까지 확장된다.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데크는 '나가는 곳'이 아니라 '거실의 연장'이어야 한다.

복도를 통로로 두지 않는 방법

세 모듈을 H로 묶으면 가운데 6평 모듈이 두 동을 잇는 통로 역할을 하게 된다. 작은 집에서 복도는 대개 손해다. 면적을 쓰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H-24는 이 6평의 벽을 넓은 통창으로 열었다. 방으로 향하는 몇 걸음 사이에도 풍경이 따라오고, 낮 동안 집의 가운데가 가장 밝은 구간이 된다. 통로가 아니라 빛이 지나는 길로 쓰이는 셈이다.

조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는 것'

바다가 보이는 땅에 집을 지으면 바다가 보인다. 여기까지는 부지의 몫이다. 문제는 어디에서 보이느냐다.

H-24는 실마다 창의 높이와 위치를 따로 잡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눈높이, 소파에 기댄 눈높이, 식탁 의자에 앉은 눈높이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창을 먼저 정하고 그다음에 가구가 놓일 자리를 잡는 순서로 진행했다. 그래서 어느 방에 있어도 바다를 등지고 앉게 되는 자리가 생기지 않는다.

주방도 같은 기준으로 정리했다. 매일 상을 차리던 시절의 주방이 아니라 두 사람의 하루에 맞춘 크기로, 1자형으로 면적을 덜어냈다. 대신 벽면을 따라 맞춤 상부장을 짜 넣어 오래 머무는 주에도 부족하지 않은 수납을 확보했고, 가구는 E0 등급 자재로 제작한다. 덜어낸 것은 면적이고, 남긴 것은 머무는 시간이다.

비워둔 방을 어떻게 쓸 것인가

앞서 말한 '가끔 오는 자녀' 문제는 세컨룸에서 풀었다. 용도를 하나로 못 박지 않았다.

창가에 붙박이 평상을 짜 평소에는 두 사람이 책을 읽고 차를 마시는 자리로 쓴다. 자녀가 찾아오면 침구를 펴 그대로 객실이 된다. 붙박이장을 함께 넣어 계절 짐과 손님 침구를 한곳에 정리했다. 1년에 며칠을 위해 방 하나를 비워두는 대신, 평소의 쓰임을 먼저 준 구성이다.

표준 위에서 조정한다

H-24는 유닛랩의 표준 설계안을 기준으로 이 부지와 이 두 사람에게 맞춰 조정한 결과다. 모듈은 공장에서 제작해 현장에서 결합하고, 창의 위치·가구 구성·실의 용도는 사는 사람의 동선에 맞춰 다시 짠다.

바꿔 말하면, 같은 H-24라도 부지의 방향과 사는 사람이 달라지면 창의 위치부터 달라진다. 바다가 어느 쪽에 있는지, 두 사람이 아침에 어디에 앉는지가 평면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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